“1947년 4월 10일 대한지질학회 창립총회 개최”
1년에 봄과 가을 2회의 총회를 개최하여 학회발전과 장래계획에 대하여 협의
해방 당시 국내에서 활동하던 10여명의 한국인 지질학자는 해방 후 한국 지질학계의 선구자로서 대학, 지질조사소, 광업회사 등에서 활동하였다.
1945년 11월에 상무부 산하에 지질광산연구소가 설립되었고, 1946년 8월에 서울대학교에 국내 첫 지질학과가 설립되었다.
지질학 관련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며, 1946년 9월에 서울대학교 지질학과가 위치한 청량리에 박동길, 김한태, 최유구, 김종원, 손치무, 홍만섭, 김옥준, 정병존, 정창희와 학생 3인(정봉일, 이홍원, 노수원) 등이 모여 지질학회의 창립을 논의하고, 초대 회장에 박동길 지질광산연구소장을 추대키로 합의하였다.
서울대학교 지질학 교수들을 중심으로 학회 창립 준비를 하고, 1947년 4월 10일, 박동길, 김한태, 최유구, 손치무, 홍만섭, 김옥준, 정병존, 정창희, 주수달, 그리고 지질학 전공 학생 9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한지질학회 창립총회를 서울교외 정릉숲에서 개최하였다. 창립총회에서는 학회 회칙을 채택하고, 초대 회장에 박동길, 부회장에 김한태, 간사에 정창희를 선출하였다. 매년 봄과 가을에 2회의 총회를 개최하고, 학회발전과 장래계획을 협의하기로 결정하였다.
대한지질학회가 창립된 1947년 4월부터 1950년초까지의 초창기에는 정회원 수가 9명에 지나지 않아 학술발표나 학회지를 발간하지 못하였으며, 1년에 봄, 가을로 2회씩 주로 야외에서 총회를 개최하여 회원 간 친목을 도모하고, 학회 장래의 발전과 희망에 대하여 논하고 협의를 가졌었다. 지질학회 제2회 총회는 1947년 9월에 있었는데 이 모임은 훌륭한 식사를 대접받으면서 진행되었다.
1949년 4월에는 제3회 총회를 우이동 골짜기에서 가졌다. 이리하여 총회가 1950년초까지 7회에 걸쳐 개최 되었으며, 임원개선이 없어 회장과 부회장 등에는 변동이 없었다.
초기의 지질학회 활동은 별로 뚜렷한 것이 없었다. 정회원이 7명밖에 안되는데다 광복 후 정부 수립에 이르기까지 혼란한 사회상으로 인하여 연구할 분위기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지질학회는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지질학 발전을 위한 계몽강연회를 계획하기도 하였으나 뜻대로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또한 모임이 있을 때마다 학회지를 발간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으나 모든 환경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